청주문화유산야행
슬기로운 (충청)병영생활
척화비는 고종 8년(1871) 흥선대원군이 신미양요를 치른 후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강한 항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던 비이다. 그 내용으로는 '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(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)' →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을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자는 것이요,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.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며 흥선대원군이 청에 납치 되어 조미수호통상 등 외국과 수교를 맺으며 쇄국 정책이 폐기되었다. 또한 일본의 요구에 의해 척화비는 뽑아지게 되었다. 그 후로 서교동 노상 하수도 뚜껑으로 쓰이다 76년에 발견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.